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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이야기

동북공정과 발해의 정체성

by YOBOX 2025.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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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에 맞서 역사적 정통성을 지키려는 입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1. 동북공정의 개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2002년부터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변강사지연구중심(边疆史地研究中心)을 중심으로 추진된 대규모 역사 연구 프로젝트로, '중국 변경지역 역사와 현황 체계 연구'라는 명칭 아래, 중국 동북 지역(만주) 역사와 관련된 고대 국가들을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포함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와 발해도 중국사 일부로 간주하려는 주장이 제기되며, 한국과 역사 인식 갈등을 야기해 왔습니다. 동북공정은 단순한 학술 연구를 넘어, 역사적 정체성을 둘러싼 민족주의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복합적인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고분군'을 둘러싸고, 고구려 유적의 중국 편입 시도와 관련해 한중 간 외교적 긴장이 발생한 바 있으며, 이는 이러한 역사 논쟁이 국제 무대에서도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주요 목적

  • 중국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 강화
  • 고대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지역의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
  • 북한 및 한반도 역사에 대한 영향력 확대 시도
  • 역사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동북아 영토 및 문화 영역에서의 우위 확보

중국 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자국 내 모든 민족과 고대 국가들을 중화민족의 일부로 재편성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고구려와 발해도 중국의 지방정권이나 속국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도 역사 해석의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2. 발해가 당나라 지방 정권이 아니라는 근거

중국 측은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 정권 혹은 속국으로 주장하지만, 다수의 역사적 자료와 구조적 근거를 통해 발해는 명백한 독립 국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반박이 아닌, 정치·외교·문화 전반에 걸친 구체적 근거는 발해의 독립성을 분명히 뒷받침해 줍니다.

1) 독자적인 정치 체제

  • 발해는 대조영을 시조로 한 왕조를 계승한 독립적인 군주 국가였으며, 대문예·대흠무·대인선 등 독자적인 군주들이 존재했습니다.
  • 3성 6부제라는 정교한 중앙 관료 체계를 운영했고,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되 독립적으로 변용하여 발해만의 정치 시스템을 정립했습니다.
  •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 통치 체계를 통해 방대한 국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고, 상경 용천부를 중심으로 수도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이 체계는 지방 분권이 아닌, 중앙 집권적 행정 시스템을 통해 발해가 독립 국가로 기능했음을 입증합니다.

2) 외교 활동과 대외 관계

  • 발해는 당나라 외에도 일본, 신라, 말갈, 거란 등과도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사신을 파견하고 자국의 국력을 과시했습니다.
  •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 일본 측 문헌에서는 발해를 자주국으로 인정하며, 일본과의 교류 기록이 30회 이상 존재합니다.
  • 특히 일본은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하며, 문화·경제·군사 면에서 자립한 강대국으로 바라보았습니다.
  • 발해는 자국 화폐 및 연호(예: 대흥)를 사용하는 등 명확한 독립국의 징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발해에서 출토된 '대흥보'라는 청동 화폐는 독자적인 화폐 주조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이는 단순한 속국이 아닌 경제 주권을 행사한 국가였음을 나타냅니다.

3) 문화 및 제도의 자율성

  •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적극 계승하였으며, 고분 벽화, 불상 양식, 궁궐 건축 양식 등이 고구려 양식과 매우 유사합니다.
  • 당의 유교 및 불교 문화를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자체적으로 발전시켰고, 독자적인 교육 체계와 종교 기관을 유지했습니다.
  • 발해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등 고유한 형식을 띠며, 당과는 다른 문화적 독립성이 드러납니다.
  • 국학 설립, 독자적인 율령 운영 등을 통해 단순한 지방정권 수준을 넘는 고유한 국가체제를 확립했습니다. 발해는 문화적 측면에서도 중국과는 구별되는 독자적 정체성과 계승성을 유지한 고대 국가입니다.


 

 

 

 

 

3. 발해의 고구려 계승 근거

발해는 스스로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한 국가임을 내외적으로 천명했으며, 이는 역사적·문화적·지리적 측면에서 모두 입증 가능합니다.

1) 혈통 및 건국 계보

  • 『삼국사기』, 『신당서』, 『구당서』 등의 사료에서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대조영의 부친 대중상이 고구려의 장수였다는 기록도 존재하며, 특히 그는 고구려 말기에 말갈 지역을 담당했던 무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이끌던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말갈족 정권이 아닌 고구려의 정통을 잇는 국가임을 방증합니다.
  • 발해의 귀족층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초기 주민 구성에서도 고구려 문화가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2) 문화와 풍속의 연속성

  • 발해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의 강서대묘와 유사한 형식을 보이며, 대표적으로 발해 상경 용천부 인근에서 출토된 정혜공주 묘(793년경)는 고구려 고분과 유사한 굴식 돌방무덤 구조와 벽화를 지니고 있어 문화적 연속성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무덤의 배치, 인물 묘사, 복식 등에서 유사성이 발견됩니다.
  • 고구려의 전통 무기, 마구, 건축 구조 등이 발해 유적에서도 확인되며, 문화적 연속성이 명확합니다.
  • 불교 역시 고구려에서 전래된 형태를 바탕으로 정착하였으며, 발해는 불교 사찰을 통해 문화적 정체성을 계승했습니다.

3) 국호, 제도, 정치 이념

  • '발해'라는 국호는 해동 지역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동명성왕의 전통과도 연결됩니다.
  • 발해는 자체 연호(예: 인안, 대흥 등)를 사용하며 자주적인 국가 운영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인안'은 719년에 제정되어 대조영의 독립적 통치를 상징하였으며, '대흥'은 742년부터 약 30년간 사용되며 발해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연호로 기능했습니다. 이러한 연호 사용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외교 문서와 국내 통치에서 사용되며 국가 정체성과 자주성을 세계에 천명한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 군주 중심의 정치, 정복 활동을 통한 영토 확장, 귀족 중심의 사회 구조 등은 모두 고구려 정치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4. 역사 왜곡에 대한 강력한 경고와 대응의 필요성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적 논쟁의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훼손하는 위험한 역사 침탈 행위입니다. 중국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명백한 역사 침략이며, 이에 대해 우리는 절대로 침묵하거나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발해는 정치적으로 자립한 국가였으며, 독자적인 외교와 문화를 발전시킨 독립적 존재였습니다. 중국의 이러한 역사 왜곡은 장기적으로 영토와 주권의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철저히 대응해야 합니다.

국제 사회는 역사적 진실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실제로 2005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고구려 유적의 중국 측 왜곡 표기를 우려하며 유엔기구에 이 문제를 공식 제기한 바 있고, 일본 학계 일부 또한 발해를 독립국으로 보는 견해를 표명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발해의 독립성과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발해의 역사를 정확히 알리고, 이를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우리의 정당성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학문적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국제적인 공론의 장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전달해야 합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역사적 사실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엄숙한 책임이며, 이를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과 정체성을 수호하는 길입니다.

발해의 독립성과 고구려의 계승성은 타협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며, 우리의 주권과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국제적 연대와 적극적인 대응이 절실합니다. 모든 국민과 국제사회가 이 역사 왜곡에 맞서 싸우고, 진실을 지켜내야 할 역사적 책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5. 마무리

발해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 아닌, 고구려를 계승한 명백한 독립 국가였습니다. 발해는 고유의 정치 제도인 3성 6부제와 5경 15부 62주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서는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자주성과 국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고구려식 고분 문화와 자체 연호, 화폐 사용 등은 그들의 독립성과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러한 발해의 실체를 국제 사회와 공유하고,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침탈 시도에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정체성, 주권 수호와 직결된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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